우리의 전통옷

[스크랩] [결혼한복] 한복예절과 장신구

cosmos2758 2009. 3. 8. 02:14

☪한복☪


♑한복예절

한복을 입었을 때의 자세는 어른들 앞에서는 손을 마주잡은 채로 약간 높이는 공수의 자세를 취하는데 , 이 때 남자는 왼손이 위로, 여자는 오른손이 위로 가는 자세를 하는 것이 예의이다.

결혼 과정에서 한복은 약혼 , 함들이, 폐백, 신혼여행 갈 때 예복의 의미로 입게 된다.


■ 약혼 때 한복차림

신부는 분홍색 치마저고리를 입거나 분홍색 치마저고리 위에 소례복인 당의를 입기도 한다 . 당의는 핑크색이나 흰색 바탕에 양 어깨와 앞뒤에 보를 달아 신부를 화려하고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약혼 때 신랑도 바지 저고리를 갖춰 입는 것이 신부와의 어울림이나 예법에 맞는다.


■ 폐백을 드릴 때 한복차림

신부는 녹의홍상 즉 녹색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고 이 위에 녹원삼이나 활옷을 덧입는다.


함 받을 때 한복 차림

함을 받을 때에는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는데 이것은 처녀시절의 마지막 옷으로 친정 어머니가 준비해 주는 것이다 . 두루마기는 전통적으로 남자들의 마지막 덧옷이므로 제례 때나 외출할 때 꼭 갖춰 입어야 격에 맞는 차림이 되며, 신혼여행 후나 명절 때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릴 때도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들어가야 하지만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고 절을 드린 다음 벗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다.


♑한복에 따른 장신구...

우리 나라의 역사에 따른 장신구의 변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장신구는 사용되어져 왔으며, 신석기 시대에는 장식 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장식성이 강해지면서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귀고리, 반지, 팔지, 목걸이 같

은 장신구가 기본 복식에 포함되었고, 금속 장신구 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웠다.

삼국시대의 장신구는 고려에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조선에 와서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일반 부

녀자의 몸치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장신구 사용은 상류층의 여인들에게만 허용했으며, 예외

적으로 기녀들에게 허용되었다. 반면 일반 서민의 경우에는 혼례때만 허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로의 금과 은의 조공이 있었기 때문에 금과 은의 사용에 제한이 있었긴 하나, 소박

미와 정교성에서는 미의 극치를 이루었다.


■ 귀고리

조선조 전반까지는 여자뿐아니라 남자도 사용했다. 그러나 귀고리를 착용하는 풍습은 오랑캐의 것이라

는 이유로 선조때에는 이 풍습을 고치게 하였다. 귓볼을 뚫어 작은 고리를 꿰던귀고리는 '신체발부 수

지부모'라는 유교적 사상에도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귀고리가 귓바퀴에 거는 형태의 귀걸이로 변화했

다.

귀고리의 길이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때도 있었지만, 요즈음은 귀에 달라붙는 형태를 취하는경우가 많으

며, 그런 형태의 귀고리가 한복의 단아함을 더해 준다.


■ 반지

반지는 금, 칠보, 옥, 마노, 호박, 비취, 동 같은 것으로 만들어 계절에 맞춰 끼면 좋다. 여름에는 옥종

류의 시원한 느낌의 소재를 끼며, 겨울에는 따뜻한 느낌의 금속반지를 끼면 어울린다. 즉, 10월에서 정

월까지는 금반지, 2월, 3월, 4월과 8월, 9월에는 은, 칠보반지, 5월 단오에서 7월까지는 옥가락지를 끼

면 좋다.


노리개

노리개는 패물의 하나로, 패물은 허리에 착용했기 때문에 요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려후기의 온돌문

화의 영향으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옷고름이 보편화되면서 패물 허리띠는 물론 옷고름에도 차게

되었는데 이것을 바로 노리개라 한다. 이는 신체에 패용해서 종교적으로 보신용의 노리개를 쓰는 경우

와, 부의 척도로써 과시의 목적이 있었던 장식적인 경우로 나뉠 수 있었다.

노리개는 하나를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여러 개를 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동양인들이 3 이라는 숫자를 길상의 수로 보았기 때문에 3작 노리개가 많았으며, 이는 3개로 구

성된 노리개가 가장 잘 어우러 지는 이유도 있었다.노리개는 자손만대의 뜻으로 표주박삼작이나 고추모

양의 노리개를 했고, 박쥐, 나비 등은 복이나 신의 사자로서 장수를 뜻하며, 당의나 저고리 고름에 찼

다. 노리개는 외형상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호화로운 장식이기도 했지만, 사치적인 면보다는 여인들의

염원이 담긴 장신구였다.


비녀

비녀는 계, 채, 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지며, 상고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조선후기 여인들에게

부의 상징으로 높이 얹은 머리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는 극심한 사치풍조을 조성했고, 조정에서는 가발

을 이용한 얹은머리를 금지하고 쪽머리를 권장했다. 그후부터 비녀는 널리 성행되었다. '신체발부 수지

부모'라는 유교적 사상에 의해 머리를 자르지 않던 습관이 있었으므로 긴 머리를 처리하는데 필수적으

로 비녀는 필요하게 되었으며, 여인들의 비녀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비녀의 모양과 소재는 다양했는데 여인의 머리에 꽂힌 비녀를 보고 계급을 알 수 있었다.

왕비의 경우에는 용잠과 황잠이라고 불리우는 비녀를 사용했다. 서민들의 경우에는 혼례시에만 장신구

나 치장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그 날에는 큰 비녀를 사용하는 특혜가 주어졌다.


첩지

조선시대 부녀자가 예장할 때 머리 위에 얹어 장식하던 머리 장식품인 첩지는, 3cm너비의 가체 중간에

천을 대고 그 위에 첩지를 얹어서 고정시켜 가리마 위에 올려놓고 다리를 좌우 귀 뒤로 돌려 쪽머리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장식품인 첩지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냈는데 황후와 왕비는 용첩지, 봉황첩지를 사용하였고 개구리

첩지는 내외 명부가 사용하였다. 상궁은 은제 개구리를, 정경부인은 도금개구리,정부인은 머리부분만 도

금한 개구리를 썼다.


족두리

족두리는 연지곤지가 원나라에서 유입될 때 같이 도입된 것으로,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의식때 예복에

갖추어 쓰던 관이었다. 검은 비단 여섯쪽을 이어 꿰매고 안에 솜을 넣어 겉에 장식없이 쓰기도 하고,

상부, 중앙, 옆면에 칠보, 밀화, 옥 등을 장식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뒤꽃이

재료와 두식에 따라 종류가 다양한 뒤꽂이는 쪽머리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물을 총칭한 것이다.

끝이 뾰족한 단순한 뒤꽂이 외에 실용적인 귀이개나 빗치개 등이 있다. 가장 많이 애용된 것은 화접 뒤

꽂이로 매화나 국화사이에 호랑나비가 앉은 것이었다.


장도

반가의 성인이면 일상적인 소지품으로 가지고 다녔던 장도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로써, 점차 실질적인

기능보다는 상징성과 장식성이 강조되어 여성의 노리개 장식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십장생이나 용 등

의 각종 상서로운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장식은 대칭적이며 고리가 달리는 부분에 집중적이었다.


화관

조선시대 궁중에서 의식이나 경사가 있을 때, 반가에서는 혼례시나 경사시에 대례복, 또는소례복을 입

을 때 착용한 수식물로, 관에 오색구슬로 꽃 모양을 둘렀고 나비를 달았다.

본래 귀족과 양반계급의 부녀자 예복에 쓰이던 화관이 혼례 때에 쓰인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며

관모라기 보다는 수식으로 변모 사용된다. 대개 활옷이나 당의를 입을 때 썼다. 

 

출처 : 한복의 모든 이야기 이레주단
글쓴이 : 이레주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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